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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궁궐과 정원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창덕궁

배흘림 2015. 8. 21. 06:57

 

 

주변 산하와 순응한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

(2015. 7.19)

창덕궁 돈화문 (敦化門: 보물 383호)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돈화는 『중용』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창덕궁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이 1405년에 제 2의 왕궁으로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서쪽의 경복궁과 함께 균형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동궐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고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완해준 창경궁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두 궁궐을 함께 동궐이라고 불렀다.

 

또한 창덕궁은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탔으나 그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그 자리를 270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의 제 1의 정 역할을 했으며

경복궁의 일부 전각들을 헐어 창덕궁으로 옮겨 와서 지었다.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충실히 지니고 있으며,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받아 1997년 12월 유네스코 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연재해로 쓰러져 힘겨워 하면서도 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나무의 모습에서

웬지 외세에 의해 파란만장했던 우리나라 역사를 보는 듯함은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진선문

진선문은 1996년에 복원하였다.

 

 

 

숙장문

숙장문 역시 1996년에 복원하였다.

 

 

 

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
인정문에서는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며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으로 1609년에 재건됐다.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품계석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드므

불이 났을시 화재진압용으로 물을 저장해 놓은 물동이로 화마가 찾아왔다가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는 귀여운 뜻도 담겨 있다.

 

 

 

선정문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사무공간)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 보고, 경연(국정 세미나)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리던 곳이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지형에 맞춰 정전 동쪽에 세웠다.

 

 

 

선정문에서 선정전으로 가는 복도각 아래(회랑)에서 바라본 인정전의 웅장한 모습

 

 

 

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선정전은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왕실의 큰 행사가 자주 열렸으며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다 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대조전 우측의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마지막 왕비였던 순정효황후의 거처로 해방 후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유한 장식과 벽화, 문살 등이 잘 남아 있다. 

 

 

 

 

대조전 뒤편에는 4단의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후원으로 삼았고

누마루를 뒤편으로 돌출시켜 이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성정각 (誠正閣)

남쪽에는 보춘정, 동쪽으로는 희우루라고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성정각은 세자가 서연(書筵 : 학자들과 유교 경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원래 내의원은 인정전 서쪽에 있었으나 1910년 대부터는 성정각을 내의원으로 이용하였다. 

 

 

 

희우루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을 지녔다.

 

1777년(정조 1)에 가뭄이 매우 심하였는데 이 누각의 중건을 시작하자 비가 내렸고

또 몇 달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 내려서

"희우루"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관물헌

1830년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집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 보다는 1884년(고종 21) 10월 17일(양력 12월 4일)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의 자주독립과 민씨 수구파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일으킨

갑신정변이 청나라 군대와 민씨 수구파에 의해 10월 19일에 진압된 장소로

3일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갑신정변의 역사적 무대가 됐던 곳이다.

 

 

 

 

 

 

선재 (樂善齋)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헌종은 명헌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1847년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기 위한 처소로 지었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상량정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며

대청마루 앞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가 있다.

 

 

 

뒤에 보이는 정자는 상량정으로 청나라 양식으로 지었다.

 

 

 

 

헌종의 뜻에 따라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하며 외국문물을 도입, 반영하여

낙선재 창살무늬와 상량정의 건축 양식 등에서 청나라 양식을 볼 수 있다.

 

 

 

 

 

한정당

 

 

석복헌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다.

 

 

 

수강재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황후를 모신 곳이었다.

 

 

 

 

 

 

 

 

 

 

 

 

 

궐내각사

돈화문에서 우측 진선문 쪽으로 가지 않고 똑바로 가면 궐내각사가 있다.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 있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로

일제강점기에 소멸되었다가 2005년에 복원되었다.

 

 

규장각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설치한 도서관

역대 임금의 글과 글씨, 보감 등을 보관하여 정신문화를 담당하던 곳

 

 

 

검서청

규장각에서 서책을 교정하거나 원본과 똑같이 베끼는 일을 맡아보던 검서관들이 사무를 보던 곳

 

그러나 국민을 감시하는 정권 하에서 살고있는 나로서는 검서청이란 단어에

그만 궁궐 내로 들어오는 빨간책을 사전 검열하는 관청으로 이해했었다. ㅎㅎ

 

 

책고

 

금천이 궐내각사의 가운데로 흐른다.

 

 

억석루

지난 날을 생각한다는 의미

 

 

약방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느나 어리고 귀여운 여학생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복에 긴 생머리를 풀어 헤친채 떼지어 돌아다니니

대낮에 인적이 드문 궁궐에서 귀신을 떼로 마주한 듯하여 섬뜩!!!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