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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공원같은 창경궁

배흘림 2015. 8. 17. 17:20

 

 

40여년 만에 들여다 본 창경궁

(2015. 7.19)

명정문과 행각(보물 제 385호)

 

고궁에 가끔 들러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곤 하는데 창경궁은 마음만 가지고 있었지

실행을 하지 못했는데 창덕궁에 갈 기회가 생겨 40여년 만에 창경궁 답사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아니면 6학년 때였던가?

퇴계로 5가에 학교가 있었기에 창경원으로 소풍을 걸어서 다녀 왔었고,

어느 해 봄에는 가족들과 밤벚꽃놀이를 즐기러 다녀왔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창경원이란 이름의 동물원에서

궁궐의 모습을 되찾은 창경궁이 된 다음에는 처음 방문한 셈이었다.

 

 

 

 

본래 창경궁 터에 1418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수강궁이 있었고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 둘을 합쳐서 동궐이라 하였고,

후원도 공동으로 이용했으며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 뿐만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창경궁은 궁궐의 원칙인 남향을 깨고 중심이 되는 건물들을 동향으로 배치하는 등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다.

동향으로 배치한 이유는 동쪽에 왕실 동산인 함춘원과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으로 다른 생활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다른 궁궐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에 탔고 1616년에 재건되었다.

또한 일제는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고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우리나라는 1983년에서야 동물원을 과천으로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려 가고 있다.

---창경궁 설명문 참조 및 발췌---

 

 

 

 

명전전(국보 226호)

1616년에 재건됐으며 창경궁의 중심 전각으로 각 궁궐의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전전 앞에서 앞을 보니 서울대병원 건물이 보인다.

서울대병원이 없다면 낙산이 보이지 않을까?

 

 

 

 

 

 

드므

불이 났을시 화재진압용으로 물을 저장해 놓은 물동이로 화마가 찾아왔다가

드므에 담긴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라는 귀여운 뜻도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 궁궐에 있는 드므는 크기가 작아 보인다.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중국 자금성에 있는 크기는 돼야 하지 않을런지?

  

 

 

 

 

 

우리 고궁의 원래의 모습은 이처럼 행각과 회랑으로 모든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목조건물 특성상 화재에 취약하여 어느 한 지점에서 불이 나면 궁궐이 전소되곤 했다고 한다.

 

 

 

 

 

문정전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던 창경궁의 평전으로 남향이며

일제시대에 훼손되었고 1986년에 다시 세웠다.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던 어전회의를 열던 편전

 

 

 

숭문당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함인정

임금이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건물로 1833년 다시 세웠다.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을 지녔다.

 

 

 

경춘전과 환경전

 

 

 

환경전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뜬 곳이다.

 

 

 

경춘전

대비의 침전이자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경춘전과 환경전을 뒤에서 본 모습

 

 

 

통명전(보물 818호)

가운데에 3칸짜리 대청마루가 있고 양 옆 온돌방은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으며 1833년에 다시 세운 건물이다.

통명전 옆에는 대비의 침전인 양화당이 있는데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면 창덕궁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영춘헌과 집복헌

후궁들의 처소로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에서 탄생했다.

또한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백송

소나무 종류 중 하나로 조선왕조때 중국에 사신으로 간 관리가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 것으로 생장이 느리고 번식도 어렵다고 한다. 

 

 

 

(대)춘당지

 

 

 

팔각칠층석탑(보물 제 1119호)

이 탑을 보는 순간 낯 설은 탑신이 의아했는데 설명을 읽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탑은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911년 창경궁에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다.

 

 

 

대온실

 

 

 

성종태실 및 태실비

태실은 왕족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일제는 1928년 즈음에 조선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았는데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연구용이란 대목이 뭔가 찜찜하고 석연찮다.

 

 

 

 

앙부일구

세종 16년(1434)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로 해시계의 일종이지만

24절기를 보여줌으로써 농경시대인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사용됐다고 한다.

 

 

 

풍기대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

 

 

 

 

창경궁은 다른 고궁들과 달리 전각의 수는 작지만

상대적으로 녹지가 많아 산책하기 좋은 공원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