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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경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창덕궁 후원

배흘림 2015. 8. 18. 16:58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後苑)

(2015. 7. 19) 

 

창덕궁 후원은 조선 태종때 만들어진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 만을 위한 휴식처로

응봉산 지형을 그대로 살려 지어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조경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곳이다.

궁궐 북쪽에 있다 해서 북원으로도 불렀고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기에 금원이라고도 불렀다.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후원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던 것처럼 후원도 비원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까지도 비원이란 이름을 썼던 것으로 기억나며

요즘도 일부 몰지각한 노인네들에게서 비원이라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창덩궁 후원은 25년 동안 공개를 하지 않았고 2004년에서야 후원 일부를 개방했다.

 

후원 내에서는 개별행동이 금지되어 있고 안내 및 설명을 하시는

궁궐지킴이(?)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함께 이동해야 한다.

그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개방되는 구간은 조금씩 달라진다고 한다.

 

 

 

 

후원에 입장하자마자 만나는 숲에서 이곳이 수도 서울의 한복판임을 잠시 잊게해 준다.

 

 

 

부용지(芙蓉池)

후원은 부용지에서 시작되며 창덕궁 후원의 백미로

부용지에는 부용정과 작은 섬이 어우러지며 높은 곳에 주합루가 있다. 


 

 

 

조선의 궁궐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에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는데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한층 운치를 돋궈준다.

 

 

 

부용정(芙蓉亭)

부용정(1792년 건립)은 연못에 십자(十) 모양의 정자로

남쪽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합루에서 내려다 보면 연못 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양이어서 부용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주합루에는 올라갈 수 없어서 부용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기회는 가질 수 없었다.

 

 

 

 

부용정의 기둥 두 개는 물 속을 딛고 있는데 이는 노출을 할 수 없었던 당시

한여름 무더위에 바지를 걷고 두 발을 물에 담그는 탁족의 의미도 담고 있다.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으로

높은 곳에서 부용지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도서관으로 쓰였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과 왕권 강화에 힘썼던 정조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현재의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금마문

 

 

 

의두합(倚斗閤)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촐하고 소박하며, 독서와 사색을 위해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북향으로 지어졌다.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았고

 18세에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으나 22세로 요절하였고 후에 익종으로 추존됐다.




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애련지(愛蓮池)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애련정(愛蓮亭)

애련정은 숙종 대에 건립했으며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1827년부터는 효명세자가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뽕나무

키 12m, 수령 4백년이 된 이 뽕나무는 농사와 함게 누에치기가 국가의 중요 기간산업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뽕나무 가꾸기를 장려하고 궁궐 안 곳곳에 뽕나무를 심어

왕비가 직접 누에치기 시범을 보이는 친잠례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관람정(觀欖亭)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이다.
관람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관람정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니 부채꼴 모양이 선명하다.

 

 

 

관람정(좌), 승재정(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승재정(勝在亭단칸의 사모지붕으로 세워졌다.

 

 

 

존덕정(尊德亭)

존덕정은 1644년에 세워졌으며 연못을 굽어보는 자리에 있다.

정육각형 형태의 정자로 겹지붕(이중으로 올린 처마)이 특이한 건물이다.

겹지붕을 받치느라 세워진 여러 개의 기둥들이 복잡하고 산만하게도 보인다.


 

 

 

존덕정 안 북쪽 벽에는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주人翁自序)"라는 제목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정조가 집권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내용은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니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뜻으로 이는 평생 왕권 강화에 힘썼던 정조의 정치철학이 담긴 글이다.

 

그리고 화려하게 단청을 입힌 천장 한 가운데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청룡과 황룡이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폄우사(砭愚榭) 

폄우사는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으로

폄우(砭愚)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뜻이다.

 

폄우사는 길쭉한 맞배지붕 건물이며 뜰 바닥에는

양반걸음 걸이에 맞춰 팔(八)자 모양으로 박석이 놓여 있다.

해설사 선생님이 어린아이를 불러 팔자걸음의 시범을 선 보이고 있는 장면이다.

 

 

 

취규정

존덕정에서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마치 깊은 산 속에 들어와 잇는 듯한 느낌이 드는 취규정에 당도한다.

 

 

 

취한정(翠寒亭)

예전에 이곳이 소나무 숲이었는데 소나무의 찬 기운을 모은다고 취한정이란 이름을 붙였다.

 

후원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음나무 등 106여종 29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가을의 붉게 물든 단풍과 하얀 눈이 쌓인 후원의 아름다움은 한 폭의 산수화다.

 

 

 

소요정(逍遙亭)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는 옥류천이다.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등 정자 5개가 모여 있다.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후원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로 말 그대로 후원의 속살이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옥처럼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여기에 임금과 신하들이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옥류천(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며

오언절구 시는 숙종의 작품으로 일대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태극정

 

 

 

청의정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으로 주변에는 작은 논을 끼고 있다.

 

 

 

농산정

정면 3칸의 비교적 큰 정자로 온돌방과 부억이 있고 임금이 잠을 자기도 했다.

 

 

 

연경당(演慶堂)

1828년(순조28년)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연경당을 건립했는데

 원래의 모습은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한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한 건물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주인대감의

일상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선향재(善香齋)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한 독특한 건물로

당시 여러나라의 선진문물과 과학기술을 흡수하여 세운 건물이다.

 

 

 

 

 

 

 

 

농수정

 

 

 

 

 

창덕궁 향나무

750년 정도로 추정하며 높이 5.6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향나무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