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유적지

배흘림 2011. 11. 9. 18:06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1. 10. 26)

 

 호치민의 영묘

 

 

호치민은 유언장에서

"나의 장례식을 웅장하게 하여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화장해 달라."했다는데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 같았던 그의 소박한 인품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를 이어 권력를 가진자들에게는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이라는 이름이 누리는

인기와 그에 따른 영향력을 이용하여 유훈정치를 하고픈 욕망이 있었을 지도 모르죠.

 

그리하여 유언과는 정반대로 부패방지처리를 하여 이렇게 모셔두었답니다.

영묘는 레닌의 묘와 흡사하게 만들었으며 행성 중에 토성이 보존의 기운이

 가장 강하다는데 다낭지역에서 나는 토성기운의 대리석으로 장식했답니다.

 

영묘에는 출입에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적용되는데

 반바지나 슬리퍼 차림은 허용되지 않으며 사진촬영 물론 불허,

오전에만 개방되고 월요일과 금요일에도 개방되지 않는 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시신을 러시아로 옯겨 부패방지처리를 해야하는데

 지금 호치민의 시신이 러시아에 가 있는 상황이라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답니다. 

 

 스스로 권면하며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초라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옥중시)

 

 

 

 

영묘 옆 좌우에 큰 글씨로 씌여진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구호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 만세-

-호치민선생과 우리의 과업은 영원하리라-

뭐 이런 뜻이라는군요.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바딘광장

 

베트남 국기 뒤로는 잔디밭이 240개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240기의 순국선열을 의미하지만 묘지는 아니라고 합니다.

 

 

 

호치민 생가 입구

 

 

 

 

프랑스식민지 시절 총독관저로 사용했던 건물로 독립 후에 호치민이 사용했으나

 이렇게 호화로운 집에서 생활할 수 없다며 1954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합니다.

 

이후 이 건물은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베트남은 습도가 매우 높은 지역이라

 종이벽지를 사용하면 얼마 못가 새로 시공해야 한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서는 우리처럼

 도배란 것이 거의 없이 페인트로 마감하는데 영빈관만은 내부가 화려한 벽지로 꾸며져 있답니다.

 

 

 

 

시원하게 곧게 뻗은 나무가 녹색과 함께 청량감을 주네요.

옆의 사람의 키와 비교하면 나무의 키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명 54호집으로 부르는데 프랑스식민지 시절 전기공이 살았던 집으로

 총독관저에서 나온 호치민이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러시아에서 보내준 생전 호치민이 이용하던 차입니다.

 

 

 

 

 

 

 

 

 

 

호치민은 큰차를 타지 않고 소박하게 작은 이 차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호치민의 식탁으로 그는 생전에 1식 3찬의 소박한 밥상을 즐겼다고 하네요.

 

 

 

 

 

 

 

 

 

 

붓목(부처나무)나무인데 뿌리가 거꾸로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매우 독특한 나무입니다.

처음에는 남근모양을 하다가 점점 부처형상으로 변하기에 부처나무라고 부른다네요.

 

 

 

 

 

 

 

 

 

 

호치민이 1958년 5월부터 1969년 8월까지 머물렀던 집(Nha San)입니다.

 

 

 

Nha San 내 사무실

 

 

 

 

 

 

Nha San 1층 탁자 등 집기

 

 

 

 

 

 

Nha San 1층에 있는 전화기

 

 

 

월맹군 특유의 게릴라 작전으로 전력이 월등했던 미국을 결국 패전으로 몰고간 지하방공호   

 

 

 

연못에서 호치민은 물고기들과 교감하며 결혼하지 않았던  쓸쓸함과 무료함을 달랬답니다. 

 

 

 

호수 건너편에서 본 1954집

 

 

 

호수 건너편에서 본 Nha San

 

 

 

속의 야자나무가 겉의 나무를 죽이면서 성장을 합니다.

설명을 들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호치민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베트남과 호치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 어려운 편이지요.

아직도 우리에겐 색깔론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고 이념으로 인한 똑같은 전쟁을 치루었지만

우리나라가 지원했던 자유진영이 패망하고 우리식 표현대로하면 적화통일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치민의 공산주의는 레닌의 공산주의나 중국 모택동의 공산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고

 조국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수단과 방편에 지나지 않은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우리의 독립투사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호치민이 얼마나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지를 보여주는 어록입니다.

 

일분변 응만변 (一分變  應萬變)

변하지 않는 것의 한가지(독립)만,

변하는 모든 것에 대응한다.

 

 

 

 

 

월남은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로부터 지원받은 전투기 600여대, 헬리콥터 900여대

공군력이 세계 4위, 70만 병력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패망했습니다.

 

월남이 패망한 이유

 

1.지금도 베트남의 기업문화는 가족끼리 운영하는게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나라의 운영을 일가친척들이 끼리끼리 좌지우지했다고 합니다.

 

2. 유학파들이자 천주교신자들이 정권을 잡자 전인구의 90%가 불교도이고

 사회중의 국가인 현재도 불교를 인정할 정도로 불교가 뿌리깊은 국가에서

 불교도를 탄압하여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를 환속시키고 집회를 금지하여

 1968년 베트남의 큰스님이 분신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답니다.

 

3. 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해준 물자를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할

물자를 암시장을 통해 판매하여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4. 반공주의자를 자처하고 정적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숙청했다고 합니다.

 

5. 월남의 정규군은 55만이명였는데 이중 10만명 이상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장성들이

 운영하는 사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까지 있었답니다.

 

-사족이지만 어찌 우리 상황과도 그리도 흡사한지 씁씁합니다.-

 

 

 

 

1956년에 총선을 치루기로 했으나 월남측에서는 북의 호치민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던 상황이라

 미국의 후원을 받아 1955년에 단독선거를 치루고 응오 딘 데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1958년에는 역시 미국의 후원을 받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하고 반공법이 시행되는 등

 결과적으로 분단으로 치달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됐던 무기류

 

 

 

군복

 

 

 

 

아들 구형제를 전쟁터로 내보냈다가 아들 여덟을 잃고 막내아들만이 겨우 살아 돌아와서

막내아들을 껴안고 통곡하는 노모인데 전쟁의 비극을 이 한 장의 사진이 모두 말해 줍니다.

 

 

 

 

그 어려운 전쟁 중에도 호치민은 매년 천 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국비로 유학을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전후 통일이 되면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겠지요.

 

 

 

 

  장기를 배우며 2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호치민의 옥중시-안경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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