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리살공원과 인트라 무로스, 산티아고 요새

배흘림 2015. 11. 18. 10:32

 

 

 

필리핀 속의 스페인 인트라 무로스와 독립의 얼이 담긴 리살공원

(2015. 11. 7)

호세 리살 (1861년 ~ 1896년) 기념비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이자 영웅인 호세 리살 기념비

 

 

호세 리살의 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부유한 지주이며 사탕수수 농장주였고

어머니 테오도라 알론소는 당시 필리핀에서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리살은 마닐라에 있는 아테네오 데 마닐라와 산토토마스대학교에서 배웠으며

스페인의 마드리드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의학과 교양학을 공부했다.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곧 스페인에 유학온 필리핀 학생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고

조국에 대한 스페인 식민통치의 개혁에 힘썼으나 필리핀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에 있어 최대의 적은 당시 심각한 혁명을 겪고 있던 스페인이 아니라

정치·경제면에서 필리핀을 마비상태에 빠뜨린 것은 수도회 탁발수사들이라고 보았다.

 

파리와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 공부를 계속했고, 1886년 타갈로그어로

〈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이라는 첫번째 소설을 발표했으며,

 여기에서 가톨릭 탁발수사들의 사회지배가 낳은 죄악상을 격렬하게 파헤쳤다.

 

이어〈 체제전복 〉(1891)을 발표하면서 개혁운동가로서 명성을 다졌으며

 안토니오 모르가의 〈필리핀의 역사 〉의 주석판(1890)을 내어

 필리핀은 스페인이 오기 전부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간행되는 신문인 ( 라 솔리다리다드 〉에 수많은 글을 발표했는데

리살은 필리핀을 스페인의 한 주(州)로 통합하고 스페인 국회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

 스페인 탁발수사를 필리핀 탁발수사로 교체할 것,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할 것,

필리핀인과 스페인인의 법적인 평등을 보장할 것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부모와 친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1892년 귀국하여 마닐라에서 비폭력 개혁단체인

 '필리핀 동맹을 결성했으며 이 때문에 민다나오 북서부의 다피탄으로 추방되었다.

여기서 4년 동안의 유배기간중 과학을 연구했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1896년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카티푸난이 폭동을 일으켰고

리살은 그 단체와 무관했고 폭동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나 체포되었다.

스페인 군당국은 그를 재판에 회부, 유죄판결을 내려 마닐라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하였다.

 

그의 희생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형되기 전날, 산티아고 요새에 갇혀 있을 때 리살이 지은

 〈마지막 이별 Útimo adiós〉은 19세기 스페인 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다음 백과사전 참조---

 

 

 

 

호세 리살이 처형된 장소를 공원화한 리살공원

 

리잘공원은 마닐라 시내 인트라무스 부근에 있어 산책하기 좋아 보였다.

물론 패키지여행자인 우리들에겐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는 않았지만...... 

 

 

 

 

호세 리살은 필리핀에서 추앙받는 인물로

리살기념비 답사는 필리핀 학생들의 필수라고 한다.

 

 

 

 

호세 리살의 동상 앞에 서니 뜬금없이 국정교과서를 꺼내 역사를 퇴행시키고

민주주의를 역행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와 집권당의 실정에 분노하게 한다.

 

 

 

 

시계 아래 부분이 필리핀 도로 원표가 되는 지접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광화문 교보문고 앞 세종로네거리에 도로원표가 있다.

 

 

 

 

 

1945년 제국주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즈음

흔적을 지우고자 많은 필리핀 사람들을 학살하여 매장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사시사철 꽃이 핀다고......

땅에 묻힌 인골들의 원혼이 꽃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런지?

 

 

 

 

마닐라대성당 뒤쪽의 거리풍경은 마닐라 다운타운과는

 사뭇 다른 스페인 풍으로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페인 풍의 정원

 

 

 

 

영화에서 본 멕시코의 민중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집 정원과 비슷한 분위기다.

어차피 멕시코도 스페인의 식민지로 오랜 압제를 겪었으니 비슷 할 터...... 

 

 

 

정원 한 켠에 놓인 자전거들로 자전거의 프레임이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마차투어를 할 경우 주의해야 할 사항 있다.

1. 마차 탑승시 금액이 1인당 요금인지, 아니면 토탈금액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2. 화폐단위가 달러인지? 페소인지? 를 확실하게 짚고 나서 투어야 나서야 한다.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인트라무로스 16세기에 스페인인들에 의해 지어진

마닐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파시그 강 남쪽에 위치한다.

 

그 명칭은 직역하면 스페인어로 "벽 안에서"가 되며,

벽에 둘러싸인 도시 또는 요새를 의미한다.

 또한 두껍고 높은 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구조를 표현한 것이다.

인트라무로스 원래 말레이계 무슬림의 대규모 거주지역이었으며

파시그강과 만에 접해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또한 중국인, 보르네오, 인도네시아에서 와 있던 무슬림 상인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의 여러 문명과 교역하는데 있어서 이상적이었다.

 

스페인은 1571년에 마닐라의 풍부한 자원과 입지를 이용해

그 지역을 필리핀의 식민지의 수도로 선언했다.

 

성벽은 8발의 두꺼운 돌로 6.7m의 높은 벽을 올려 64헥타르의 면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정부의 중심지를 중국 해적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인트라무로스는 1606년에 완성되었고 스페인의 식민지시절

스페인의 정치, 군사,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인트라무로스에는 마닐라 성당과 산 아구스틴 성당 등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교회가 운영하는 산토 토마스 대학, 산 후안 데 레토란 대학,

아테 네오 무니시빠루 데 마닐라 대학 (현 아테 네오 데 마닐라 대학))이 있다.

--- 위키백과 참조 ---

 

 

 

 

 

 

 

 

 

 

 

 

필피핀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상

 

 

 

산티아고요새 입구

산티아고 요새는 입장료가 있다.

우리는 내부 리모델링 공사 핑계로 들어가지 않고

겉만 보고 나와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산티아고 감옥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필리핀 정치범들을 가두고 목과 코 부위까지

물을 찰랑찰랑하게 채웠는데 그렇게 2~3일만 지나면 자연스레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 저 수문을 열어 시체를 밖으로 배출했다는데

스페인 제국주의는 정말 비열한 방법을 사용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자신들의 실정을 비판하는 시만들에게

최루액을 녹인 물대포를 화끈하게 쏴버리는데 말야.ㅎㅎ

썩을 년,놈들......

 

 

 

 

 

그리고 어의없는 것은 자신들의 치욕이자 남겨야 할 유적 바로 옆에 골프장을 지었는데

상당히 많은 공들이 성벽에 맞아 벽에 생채기가 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생각있는 시민운동가들이 골프장백지화를 주장하고 있지

부패한 관료들과 무뇌충 부유층이 들을리 만무하다.

어째 수준이 우리와 그리도 비슷할꼬?

 

 

 

감옥

 

마닐라여행 내내 맑았던 날이 마지막 일정의 시작인 리살공원부터 잔뜩 찌푸리다가

산티아고 요새에 도착했을 때는 가랑비로 그리고 차를 타자마자 스콜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나오자 하늘은 말끔히 개었으니 역시 나의 신력(?)이 발휘가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