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김해 여행) 국립김해박물관

배흘림 2015. 9. 10. 17:50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볼 수 있는 국립김해박물관

(2015. 9. 5)

 

국립김해박물관은 경남 김해시 구지봉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가야(가락국)의 고도답게

가야의 문화와 역사를 보존하고 전시하고 있는 고고학박물관이다.

 

 

 

 

고인돌 (왼쪽 위) :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인 고인돌

남부 지방의 고인돌은 땅 위에 덮개돌과 덮개돌 받침이 드러나고

땅속에 주검과 유물이 들어가는 돌널이 있는 구조이다.

 

돌덧널무덤 (왼쪽 아래) :  경남 창원시 다호리유적에서 발굴된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5세기 무렵부터 널리 쓰인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두텁게 깬 돌을 쌓아 긴 네모꼴의

돌덧널을 만들어 그 속에 주검과 토기 및 철기와 같은 다양한 껴묻거리를 묻었다

 

돌널무덤 (우측 아래) :  구덩이를 판 뒤, 편평하게 다듬은 돌의 평면형태가

 'ㅍ'자 모양이 되도록 짜 맞추고 바닥에도 편평한 돌을 깔아 만들었다.

무덤 속에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시 뚜껑돌을 덮었다.

이러한 돌널무덤은 단독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고인돌의 하부구조로도 쓰였다.

이 돌널무덤은 경남 진주시 대평유적에서 집터 및 밭터와 함께 발굴된 것이다.

---국립김해박물관 홈페이지 발췌---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을 구우면 단단해지는 변화를 터득하여 그릇을 만들고, 식량을 저장하게 되었다.

가장 빠른 신석기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유적에서 출토한 무늬없는 갈색토기이며

신석기시대 중기에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유행했다.

 

 

 

  • 빗살무늬토기 (높이 34.0㎝)
  •  

     

     

     

    창녕 비봉리유적에서 발견한 배와 노는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노의 길이는 1.8m로 졸참나무로 만들었고 선 채로 노를 저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는 소나무를 단면 U자상으로 파내어 만들었으며 약 7,7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이키리키유적의 배보다 약 2,000년 이상 오래된 것이다.

     

     

     

     

    붉은 간토기 (청동기, 높이 13.0㎝)

     

     

     

     

    청동기시대 토기는 민무늬토기이며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사용되는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민무늬토기

     

     

     

     

    암각화는 바위 표면에 새겨진 그림으로 자연바위뿐만 아니라

    고인돌이나 선돌같은 거석유구나 제단시설에서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암각화로 울산 반구대 바위그림(국보 제285호)이 있으며,

    고래, 멧돼지와 같은 동물의 사냥이나 고기잡는 그림은 풍요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의식과 종교 관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청동검과 칼집 (길이 55.6cm)

     

     

     

     

    통나무관

    변한의 널무덤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그 속을 파거나 긴 나무판을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이 통나무관은 약 240㎝ 길이로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만들었다.

    난 설명을 읽기 전가지는 식량을 저장하는 통인줄 알았다. ㅋㅋ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인데 

    이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물건은 청동검, 옥, 거울, 옻칠제품 등이 있다.

     

     목걸이는 옥이나 수정을 갈거나, 유리를 녹여서 만들었고

    거울은 빛ㆍ태양ㆍ별과 연결시킬 수 있는 신성한 물건이기도 하다.

     

    거울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거울 뒷면에 있는

    다양한 무늬로 사용했던 시기와 어떤 지역의 거울인지를 알 수 있다.

     

     

     

     

    청동검은 옻칠한 칼집 속에 있던 것으로,

    유기물질은 대부분 썩어 없어지고 금속인 검이나 부속구만 남았다. 

     

     

     

     

    삼한(弁韓ㆍ辰韓ㆍ馬韓)은 주변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개척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 변한에서는 본격적인 철제품과 새로운 토기를 사용하였다.

     

     새로운 토기는 회색의 고운 진흙과 회전물레를 사용하여 만들었고, 높은 온도의 밀폐가마에서 구웠다.

     이렇게 만든 와질토기는 두께가 얇은 편이며, 삼국시대의 토기보다 단단하지 못하고, 흡수성도 강했다.

     바닥이 둥근 항아리가 만들어졌으며, 그릇 표면에 여러 가지 타날무늬로 장식하였다.

     

     

     

     

     

     

    짧은 목항아리 (삼한시대 : 변한)

     

     

     

     

    가야의 철기문화는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철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규격화된 덩이쇠는 현재의 화페나 금괴의 역할을 하면서 활발한 교류의 매개체가 되었다.

     

     교류의 결과, 가야에는 주변 나라의 귀중한 물건이 많이 들어왔고.

    철제품은 활발한 교류뿐만 아니라 각 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단단한 철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도끼ㆍ낫ㆍ창ㆍ화살촉 등 다양한 무기류가 나타났다.

     

     

     

     

    청동검에서 바뀐 날카로운 철검은 실용적인 무기지만,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달고 그 안에 용이나 봉황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고리자루칼이라 부르며, 금ㆍ은을 사용하여 다양한 무늬로 꾸몄다.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ㆍ백제ㆍ신라에서도 신분ㆍ권위의 상징물이었고

     미늘쇠는 길쭉한 철판의 가장자리에 가시 모양의 미늘이 달린 철제품이다.

     

    합천 옥전ㆍ함안 말이산고분군 등 큰 무덤에서는 새모양의 미늘이 달린

    큰 미늘쇠가 출토되는데 이것은 묻힌 이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고,

    새모양 토기와 함께 새를 숭배했던 그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준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의 가야는 고구려의 남정(400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6세기대 이후 신라의 본격적인 팽창 정책으로 창녕 지역이 먼저 신라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그 뒤 금관가야 멸망(532년), 대가야 멸망(562년)을 끝으로 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 대성동유적에서도 5세기 초엽에 큰 무덤의 축조를 중단하였고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독특한 토기나 장신구도 신라 지방 문화의 하나로 바뀌어갔다.

     

     

     

    금 귀걸이

     

     

     

     

    가야무덤에서 발견되는 금동관, 봉황과 용이 장식된 고리자루칼, 새모양 미늘쇠, 무더기로 쌓인 덩이쇠 등

     다양한 종류의 구슬과 금ㆍ은 장신구는 가야 지배자의 실체와 위상을 대변한다.

     

     또한 김해·함안·고령 등 옛 가야의 중심지에 있는 큰 무덤과 순장으로

    가야제국이 연맹체단계를 넘어 고대국가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대왕大王’을 새긴 목항아리의 존재와 대가야 국왕 하지가 중국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으로 책봉된 사실(479년)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자가 왕으로 불리었음을 알려준다.

     

     

     

    금동관

     

     

     

     

    화려한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착용한 사람의 정치ㆍ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역할도 한다.

     가야 이전의 변한사람들도 수정·호박·마노 등의 보석 광물과 함께 유리·금속을 이용하여 장신구를 만들었다.

     

     1~3세기 유적에서도 옥이나 유리로 만든 구슬 장신구가 자주 발견되는데

    3세기 대의 문헌인『삼국지위서 동이전에 진한ㆍ변한 사람들은

    "`금ㆍ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꿰어 보배로 삼는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김해 대성동유적에서 금동관ㆍ허리띠ㆍ말갖춤 등이 확인되며,

    5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금ㆍ은으로 만든 귀걸이나 팔찌가 많아진다.

     

     

     

     

     

     

    뚜껑·굽다리접시

     

     

     

     

     

     

     

     

     

    청동제품

     

     

     

    큰항아리

     

     

     

    집모양토기

     

     

     

    새모양토기

    고대 사회에서는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졌고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새를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무덤 속에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묻었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철기 문화가 늦게 들어왔기 때문에 철제 농기구로 농사짓는 것이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풍부한 철과 뛰어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도끼ㆍ따비ㆍ괭이ㆍ낫 등 중요한 농기구를 모두 철로 만들었다.

     

     

     

     

    살포

     

     

     

     

    밑바닥이 둥근 항아리는 가장 단순한 형태지만, 아가리의 길고 짧음과

    벌어지는 곡선에 따라 소박한 가야 토기의 미적 감각을 잘 표현된다.

     

     둥근 바닥 항아리를 받쳐두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이 그릇받침으로

    길쭉한 원통 모양과 넓은 바리 모양, 화로 모양으로 구분된다.

     

     그릇받침은 도질토기와 함께 나타났지만, 대형급 무덤을 축조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처음에는 일상용이었으며, 점점 높이 치솟은 형태로 바뀌면서 제사 등 공헌용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무늬와 세로띠, 굽구멍, 작은 흙인형을 붙이는 등 화려한 장식미가 두드러진다.

     

     

     

    목항아리와 그릇받침(우)

     

     

     

     

     

    종이를 발명하기 전 사람들은 나무나 대나무를 다듬어 종이 대신 사용하였다.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붓과 글자를 지우는데 사용된 손칼이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 대에 이미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유물에 새겨진 대표적인 글은 김해 양동리유적의 청동세발솥 "서구궁"과

    합천 저포리유적의 항아리에 새겨진 "하부사리리" 등이 있다.

     

     

     

     

     

     

    뚜껑·큰항아리

     

     

     

    굽다리접시와 잔

    굽다리접시는  얕은 접시가 긴 굽다리 위에 붙은 모습으로 

     가야토기 중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며 제사그릇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가야의 잔은 형태가 다양하며, 오늘날의 컵과 비슷해 ‘컵모양 토기’라고도 부른다.

     

     

     

    뚜껑· 굽다리접시

     

     

     

    가야토기

     

     

     

    가야는 풍부한 철 생산지와 유리한 교역 환경때문에,

    주변 나라의 표적이 되어 자주 전쟁을 치뤄야 했다.

     

    전쟁을 위해 여러 가지 종류의 무기를 개발하였으며, 대표적으로 칼·창·화살 등이 있다.

    무기는 전쟁 이외에도 용·봉황을 장식한 큰 칼이나 매우 긴 창 등으로 신분 과시에 사용하였다.

     

     

    활, 화살, 화살촉, 화살대, 화살통

     

     

     

    쇠갑옷

     

     

    갑옷과 투구

     

     

    발걸이, 말머리 가리개, 재갈

     

     

     

     

     

    말안장

     

     

     

    가야와 주변 나라가 교류하는 데 일등공신은 철이었고,

    물건만 서로 주고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교류로 바뀌어갔다.

     

     김해 대성동 양동리유적에서 출토된 중국과 일본 물건,

    Roman Glass 파란색 유리조각은 금관가야의 다양한 국제성을 보여준다.

     

     5세기 대에는 대가야지역에서 챙 달린 투구 등 일본계 금속제품, 합천 옥전무덤에서는

     서역과 관련된 유리잔, 고령 지산동유적에서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도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도 가야 토기·덩이쇠 등 가야계 유물이 확인되며,

    스에끼라는 일본식 도질토기와 이전에 없던 다양한 철제품을 유행시켰습니다.

    5세기 이후 일본 규슈, 긴키지역에서 대가야계 금동관이나 금귀걸이, 금·은제 말갖춤이 발견되었다.

     

     

     

    ※ 이 글은 김해시와 부신시가 주최한 허왕후신행길축제 팸투어 참가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