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배흘림 2011. 6. 3. 16:44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2011. 5. 27)

 

 충북 보은군에 웬 동학혁명기념공원?

스스로 고백합니다. 

무지했슴을.......

 

동학난에서 동학농민운동으로 그리고 동학혁명으로 역사를 바로 세운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또 우리 국민들이 독재정권의 그릇된 역사교육과 우민화정책에 그리 됐으니 위안을 삼아야지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중 하나인 보은군 성족리 일원에 조성한 공원으로 상징탑, 돌성,

 민중의광장, 하늘길계단을 설치하여 동학운동의 이념과 역사적 가치를 보고 느낄수 있는 자연 친화형생태 공간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동학의 역사는 전북 고창과 공주 우금치 정도에만 있는줄

 알고 있었는데 이 곳 보은의 북실마을도 중요한 성지였더군요.

 

        이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있는 북실은 보은읍에서 속리산쪽을 향해 왼쪽으로 자리잡은 경주 김씨의 세거지인 산골마을입니다.

       갑오년 12월에 동학농민군이 조직적으로 저항한 마지막 전투가 있었는데 바로 이 보은 북실싸움이었다고 합니다.  

 

       북실싸움은 공주우금재 전투이후 전라도 남동부를 거쳐 충청도 쪽으로 패주하던 북접 주력군의 최후이자 2차봉기의 대미였으며

      ·손병희 부대의 처절한 혈전이었는데 이 전투로 2,600여명의 농민군이 피살돼 주변에 집단매장 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답니다.

 

        동학의 덕목인데 봉건시대에 이렇게 파격적인 강령을 내세웠으니 혁명이 아니라 할 수 없겠죠?

      특히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는 요즘처럼 돈좀 가진 천민들이 날뛰는 천민자본주의 사회에 울리는 경종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12개항에 달하는 폐정개혁안 역시 혁명적이며 민주시민이라면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지켜야 할  사항입니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24일 새벽 4시 일본군이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침범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범함

 

 청일전쟁 발발

7월 25일 오전 7시 아산만에서 일본함대가 청의 군함에 함포사격을 가해 청일전쟁이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들

충청도, 경기도, 평안도는 청일전쟁의 무대로 변해 도시가 파괴되고 마을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음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1894년 8월 2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지 10일만에 보은에서 동학도 수백명이 구국의 결의를 다지며 의병봉기에 나섰다.

 보은군수 정인량이 집결지로 찾아오자  국가의 위기를 맞아 관민이 함께 힘을 합쳐 싸울 것을 요구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가까이에서 담고 크롭하니 동학혁명군의 눈에 뜨거운 의지가 담겨있네요.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 산 16번지

 

 

※아래글은 보은문화원 홈페이지(http://www.becc.or.kr)

동학의 창도와 전개, 시대상황, 역사적 의의 등의  글이 있어서 발췌, 옮겨 싣습니다.

 

 

동학(東學)의 창도(創道)와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 동학의 창도

새로운 민족종교인 동학은 1860년 4월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경주에서 창도한 종교이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동학교리에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고, 전통 주문과 부적 등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 이념이 들어가 있고, 외세에 대한 단호한 배격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쉽게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혁신 지식인을 통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다.


최제우는  몰락한 양반가의 일원으로서 19세기 조선의 혼란한 사회 현실을 직접 겪은 인물이었다. 동학의 경전인《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에는 교조 최제우의 현실과 인식과 난국의 극복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즉 모순에 찬 사회현실과 거세지는 외세 침략의 위기를 자각하고, 신비한 종교 체험을 통해 제세(濟世)와 구국(救國)을 위한 우리의 새 민족종교를 창도한 것이었다.


경전에서 파악하는 사회인식은 명확하다. 당시 왕조는 시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였다. 조선사회 체제의 근본 바탕인 신분제는 여기서 부정될 수밖에 없었고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어 갔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고치고,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노비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러한 사회를 많은 농민들이 동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조선국가의 지배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집권세력은 외세에 대한 배격문제에는 시각이 같았지만 신분제를 부정하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동학이 커지면 왕조정부에 정면 대항할 수 있다는 종교단체로 위기의식을 느껴 1864년 봄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교조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로 간주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관헌에 붙잡혀서 처벌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용담에 모이던 교도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2. 동학교세의 확대

동학은 제2세대 교주 해월 최시형(崔時亨)이 태백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한 뒤 소백산맥 양편지역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거점으로 여러 군현을 전전하며 은밀히 포교해 다시 교세를 증대시켰다.


동학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 이래 구미 열강과 국교를 확대한 이후 더욱 교세를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영국과 조약을 맺은 뒤 기독교의 포교가 허용되고 외세의 침투가 본격화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동학은 더욱 포교를 확대해 나간 것이다.


3. 교조의 신원운동

1890년대 들어와 교세는 종전과 달리 삼남 일대에 널리 확장되고 동학교도들은 갈수록 늘어나지만,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지방관아의 탄압은 계속되고 심해져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동학교세가 증대되자 더 이상 사료로서 박해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대두하였다. 왕조정부에 요구하여 포교의 공인은 먼저 억울하게 처형된 교조 최재우의 죄명을 씻어주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하였다. 교조의 원한이 풀려지면 자연히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금지조치가 해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교조신원운동은 1890년대에 들어서서 시작되었다. 국교확대 후 10년에 걸친 사회변동은 농민 생활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외세에 대한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동학이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데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1891년 충청감사 조병식이 부임한 뒤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정도가 심해져 교단의 방침을 바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교단의 고위 간부들인 서병학과 서장옥이 1892년 7월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교조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동학에 대한 탄압을 금지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이 해 11월 삼례에는 수천의 동학교도들이 모여 강경한 내용의 호소문을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의 지방관이 동학교도들을 지목하여 체포하고 돈과 재물을 탈취하며 사상자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양반들이 더욱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으니 이를 금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창도이래 처음 시도된 대규모 집회로서 지방 관헌에게는 적지 않은 압력이 되었다. 전라감사는 각 군현에 공문을 보냈는데 내용은 동학에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타일러서 정학 즉 유교의 공부에 힘쓰게 해야 하지만, 박해는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교조신원운동은 왕조정부에서 금지하기 때문에 지방 관헌을 대상으로 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서울로 올라가 국왕에게 호소하는 방법뿐이었다.

 

1893년의 보은집회와 그 전개과정
 

1. 1893년의 보은집회와 왜양(倭洋)의 배척 

 전라감사의 침학 금지 공문이 관하 각 군현에 내려간 후 삼례 집회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였는데 침학 금지는 말뿐이었고 동학에 대한 탄압은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교단에서는 왕조정부에 교조의 신원을 호소해서 포교를 공인받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다. 이에 1893년 정월 보은군 속리면 장안마을(장내리)에 대도소를 정하여 교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교조의 제사를 위해 동학 지도부가 청산 갯마을(浦田)에 모인 때인 3월 10일, 교주 최시형은  동학도인들을 한 지역에 모이도록 하여 정부에 압력을 넣어야겠다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장소는 보은의 장안마을로 정했다.


같은 시기 동학교도들은 전라도의 금구 원평에 모여들었다. 원평집회가 동시에 열린 이유는 첫째 봄철 농사 준비가 바쁜 시기에 많은 사람이 보은까지 참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하나이고  둘째는 보은교단의 지도부와 성향이 다른 적극적인 사람들이 모인 집회일 수 있다는 점이다. 

 

보은 집회의 일차 통유문(3월 11일자)은 교조 신원과 사회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차로 나온 통유문(3월 16일자)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종교운동으로 시작했지만 개혁과 외세 배척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해간 것이다.


 


2. 보은집회의 전개과정

보은집회는 기록마다 다르나 일인 당 돈 1푼씩 걷었는데 모두 2백 3십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천명 이상이 모였는데 지방관아에서 볼 때 전무후무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즉각 보은군수는 왕조정부에 보고하여 그 실상을 알렸다.  군수 이중익(李重益)의 보고를 받은 정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3월 16일에 해산명령을 내리고 17일에는 호조참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여 현지로 가서 해산시키도록 했다

어윤중은 명을 받고 보은까지 내려오면서 비교적 상세하게 동학의 교세와 도인들의 성향을 파악한 다음 동학도들과 대화에 나서 집회의 의도를 자세히 듣고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주장이 명백한 동학도들에게 위압보다는 설득을 통해 해산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정부는 3월 28일 어윤중의 장계 내용을 논의한 결과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4월 1일 아침 고종의 윤음을 전달받은 어윤중은 곧 청주진 영장 백남석(白南奭) 및 보은군수와 함께 장안마을로 가서 윤음을 읽어주고 퇴거하기를 명령하였다. 동학 교단의 지도부는 정면 충돌하지 않으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동학교도들은 4월 2일부터 장안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20일 간 집결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하였고, 교주 최시형도 상주 방면을 향해 떠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상황과 북실전투
 

1. 동학농민전쟁 시기의 보은의 상황

1893년 봄 보은군의 장안 마을의 동학 집회가 해산 된 뒤에도 구조적인 사회 모순 속에서 부패한 관리들의 탐욕스런 수탈행위는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군현에서 농민들이 체제에 저항하는 항쟁이 속속 일어났다.


삼남 일대의 동학 교세는 갈수록 확대되었고 1894년(고종31년)에 지배층에 대한 농민들의 전면 항쟁이 촉발되었다. 그 계기는 전라도 고부군의 농민항쟁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분격한 농민들은 전봉준(全琫準)의 지휘 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원성이 많았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化中)‧김덕명(金德明)과 함께 각처에 창의문(倡義文)을 돌려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직후부터 전라도일대 수천의 농민들이 합세해 와서 곧 큰 세력을 이루고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처음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한 뒤 백산을 점거하여 기세를 올렸고,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영군도 황토현에서 격파했다. 정부에서 경군(京軍)의 정예부대를 급파하여 진압하도록 하자 동학농민군은 남하하여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으로 진군했다. 1만여명으로 늘어난 군세로 장성에서 경군과 싸워 패배시키고 곧장 북상하여 전주를 점령하였다.

 

6월 말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지게 되자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더욱 거세졌다.

전라도 지역은 물론 충청도 일대에서도 일본과 전쟁을 벌이려는 농민군의 준비작업이 전개되었다.

친일파 관료들이 정권을 쥐고 갑오경장을 추진하는 소식은 농민군의 활동을 격화시켰다. 


논산에서 전봉준의 농민군과 10월 말에 합류한 손병희 휘하의 북접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 나섰다.

 11월초에 벌어진 우금치 공방전은 치열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나 전투는 병력의 수와 사기만으로 치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농민군의 무기는 열악했고, 일본군은 근대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였다.

 산 정상에서 기관총을 설치하고 올라오는 농민군을 향해 쏘아댔다.

 이렇게 수십차례를 거듭하다가 결국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은과 영동‧황간을 비롯한 충청도 남부 일대의 상황은 농민군의 주력이 빠져나간 뒤에 역전되었다.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이 차례로 순회하면서 동학 도소를 비롯한 근거지를 파괴하고, 남아있는

 동학의 지도자들을 붙잡아 처형했으며, 교주 최시형을 지목해서 체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동학 조직은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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