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 고도 리마의 중심, 그러나 텅 빈 마요르광장
(2017. 12. 26)
리마는 페루의 수도로 인구의 30%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대도시인데
내가 이번 여행에서 보기에도 페루나 볼리비아는 국토의 많은 부분이
안데스 고산지대로 척박해서 한 곳에 몰려 살 수 밖에 없어 보였다.
리마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어서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슬픈 과거를 지닌 구시가지 엘 센트로(El Centro) 지역과
탁 트인 태평양을 바라보며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미라플로레스가 있다.
미라플로레스 지역에는 대형쇼핑몰과 유명레스토랑, 호텔, 공원 등
편의시설들이 엘 센트로 지역과는 확연히 차이나게 많았다.
마요르광장에 접해 있는 대통령궁
리마라는 도시는 에스파냐의 침략자 피사로가 약탈한 보물을 유럽으로 수송하기 위해
1535년에 항구가 있는 리마로 수도를 천도했으니 피사로에 의해 세워진 도시라 할 만하다.
당시로는 남미를 식민통치하기 위한 전진기지 격인 페루부왕령의 수도를 리마에 설치했다.
그러면서 리마는 남미 물류의 중심으로 3백년의 식민지 동안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됐다.
리마의 중심 마요르 광장 주변에는 대통령궁과 정부청사, 대성당 등이 있다.
예전에는 아르마스광장(Plaza de Armas)이라 불렀지만
아르마스라는 명칭은 식민지 식민지 시절의 명칭이라서
현재는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이라 부른다.
이날은 통제로 인해 마요르광장은 인적이 없어서인지 음울해 보였고
광장은 텅 비어 있지만 더러운 정치인들은 속을 꽉꽉 채우고 있을 것이다.
이날 마요르광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후지모리 가석방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들이 철제바리케이트로 봉쇄했고 대성당마저 관광객들의 입장을 제한했었다.
얘기 듣기로는 행인들로 복잡하고 소매치기도 많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거리가 이렇게 한산하다니 이러면 범죄율 0%가 아닐까?
바리케이트로 봉쇄된 안쪽의 수 많은 가게들은 이날 장사를 망쳤을 것이다.
후진적인 정치가 낳은 또 하나의 피해자들이 양산된 셈이다.
이 예쁜 노란 건물들은 피사로가 궁으로 썼던 건물을 현재 정부청사로 쓰고 있다.
브라질만 노란 색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페루 역시 노란 색을 좋아했다.
알고보니 잉카의 상징이 바로 노란 색이라 한다.
오후 3시 경이 넘어서면서 신분이 확인된 이들과 대성당 입장객을 위해 통제를 약간 풀었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통로는 역시 바리케이트로 굳게 막혀 있었다.
통제선을 조금 벗어난 도로에는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요르 광장과 산마르틴 광장을 이어주는 길인 라 유니온 거리(Jiron la Union)
라 유니온 거리는 보행자 전용도로로 우리의 명동쯤이라 여기면 된다고 한다.
도로가 봉쇄된 영문도 모른채 리마대성당에 들어가려고 한참을 헤맸다.
혹시 입구가 있을까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Muralla 공원이 보였고
공원 바로 옆에는 경찰대대가 있으니 안전하리라 믿고 잠시 쉬어갔다.
공원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멀리
산꼭대기에 산크리스토발 언덕과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산 중턱까지 리마의 빈민지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리마처럼 쿠스코나 볼리비아 라파스, 브리질 히우 지 자네이루의 파벨라 등은
빈민지역은 거의 다 고지대에 형성돼 있었다.
서울에도 70,80 년대에는 금호동, 옥수동, 삼양동, 하월곡동 등
고지대에 생활이 어려운 분들이 많이 살았었던 것처럼
남미의 치안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지만 특히 빈민가 지역은 불안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리마시민들도 출입을 삼가하고 특히 밤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한다
.
하지만 난 가고 싶었고 갈 수 있는 방법도 알아 놨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도저히 갈 시간이 없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다.
빈민지역에 간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어차피 차로 스쳐 지나갈테니 그들과 눈을 맟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 용기도 없었다.
다만 우리도 어려운 시절을 지났으니 그저 바라보고 응원하며 공감하고 싶었다.
남미 특히 리마와 이카 그리고 라파스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다는 티코
그러나 간혹 눈에 띄었을 뿐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지 않았다.
차량 수명이 다 한걸까?
길을 가다보니 동상이 있어서 선 촬영, 후 검색을 했더니
Ramon Castilla(1797~1867)란 인물로
20여년간 대통령과 막후 정치로 페루를 지배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San Martin (1778~1850)
조금 더 라 우니온 거리를 따라 걸으니 이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산 마르틴 광장에 도착했다.
산 마르틴 장군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는 스페인 사람이었다.
스페인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공도 세웠으나 중도에 진로를 바꿔
남미 민중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운 남미의 해방영웅이다.
산 마르틴 광장에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곳곳에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여유롭고 유쾌하지만 한 번 폭발하면 무서운 이들의 국민성을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사실 DSLR 카메라를 둘이서 3대를 들고 다녔는데 가급적 남미의
리마 같은 대도시에서는 DSLR 카메라는 노출시키지 않는 게 좋다.
내 DSLR 카메라는 오래된 것들이라 중고가격이 저렴하지만
여기 도둑 역시 저렴한 녀석들이라 크면 무조건 비싼 줄 안다고
스마트폰 역시 함부로 노출시키는 것은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대개의 여행자들은 리마를 과소평가하거나 그저 지나쳐 가는 도시로만 여긴다.
어떤 이들은 리마에서 1박도 하지 않고 바로 쿠스코로 떠나기까지 한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리마는 충분한 볼 것과 즐길거리 그리고 쉬어 갈만한 도시였다.
엘 센트로 지역에서 1~2일, 바란코를 포함한 미라플로레스도 1~2일 등
최소 꽉찬 2~3일의 일정은 필요한 도시라 여겨진다.
리마시의 교통정체를 들어 익히 아는지라 산 마르코 광장 부근에서
얼른 택시를 타고 미라플로레스에 가려는데 자꾸만 콜렉티보
(자가용택시지만 버스와 택시의 중간 운영체계)들만 호객할 뿐
라디오택시들은 빈택시도 없었고 빈택시들도 태워주지 않아서
한참동안이나 이리저리 쫓아 다니다가 겨우 숙소로 귀환했다.
물론 우리나라처럼 중앙차로로 다니는 메트로폴리타노가 있지만
그 역시 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택시를 선택했다.(15솔)
미라플로레스에서 이카사막으로 가는 길에 본 도로 풍경
리마 역시 도시집중이 심해 도로의 교통정체가 심했다.
리마에 사시는 어떤 여성 교민 분은 집을 나서 도로로 나왔는데
그날따라 도로가 한적하다 못해 훤히 비어 있었다고 한다.
뭔 일이 생겼나 했는데 마침 그날이 월드컵 축구
남미예선전 페루경기가 있던 날이었다고 ㅎㅎ
축구라면 사죽 못쓰는 남미사람들의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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