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전남 고흥) 엄마의 처녀시절 발자취를 더듬어간 소록도

배흘림 2015. 9. 1. 16:27

 

 

한센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아름다운 섬 소록도

(2015. 8. 23)

 

2007년 85세로 돌아가신 엄마로부터  "소록도는 가볼 만한 섬이다."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이번에야 처음 방문을 했다.

 

금산에서 태어난 엄마는 외조부가 자녀교육을 위해 순천으로 이주하였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소록도로 가서 간호원으로 일하셨다니

엄마로서는 분명 뭔가 꿈을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당시 교직에 있던 아버지와 중매로 결혼하면서 짧은

소록도 생활을 마감했결혼은 곧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그런저런 사연으로 이번 소록도행은 내겐 의미를 가진 여행이었다.

 

 

 

연리지나무

주차장에서 우측은 직원들의 공간으로 가는 길이며 왼쪽이

중앙공원으로 가는 길인데 그 길머리에 연리지나무가 우뚝 서 있다.

과연 이 나무는 소록도의 엄혹했던 슬픈 사연을 알고 있을까?

 

 

 

수탄장(愁嘆場)

연리지 나무 뒤 나무데크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슬픈 사연이 깃든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사연인즉, 이 도로가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뉘어 지는 경계선이고

1950년~1970년까지는 철조망까지 쳐져 있어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전염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에 격리하였고

병사지대의 부모와는 한달에 단 한번 면회가 허용될 뿐이었다.

 

그것도 아이들과 부모는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만났고

이광경을 본 사람들이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 불렀다.  

 

 

 

 

주차장에서부터 중앙공원 입구까지는 나무데크로 잘 만들어진 길이 놓여 있다.

 

 

 

 

이곳이 소록도해수욕장인줄 알았는데 해수욕장은 반대편에 있었다.

날씨가 맑을 때는 보성과 득량만이 보인다고 한다.

 

 

 

 

5분여 걸으니 소록도 중앙병원 등이 보였다.

 

 

 

애한(哀恨)의 추모비

 

소록도병원은 1916년 일제에 의해 개원하였고 환자들에게 모진 탄압과 수탈을 했다.

해방이 되자 원생들은 자치권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해방 불과 일주일 후인 8월 22일 협상대표자 84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56년만인 2001년에서야 유골발굴 작업을 하여 다수의 유골을 발굴하였고

2002년 8월 22일 학살 현장에 추모비를 세워 84명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슴을 알렸다.

 

그런데 추모비에는  학살의 주체는 "이를 거부하는 자들"이라고만 명시돼 있다.

즉,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데 과연 그들은 누구였을까?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아직도 그들 또는 후손들의 힘이 미치고 있을까?

 

 

그리고 며칠 전 "5억원을 주무르는 소록도 자치회장"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사 내용을 발췌하면 자치회장은 가짜환자에게 한센병앓이 증명서를

발급하여 소록도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해줬다는 내용이다.

 

또한 회장은 4억 7천여만원에 달하는 인건비를 집행할 권한과

소록도에 들어오는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관리하는 권한을 가진다고 한다.

 

이쯤되면 단순한 완장이 아니라 부정과 부패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보이며

빨리 제도가 보완되어 대다수 선량한 한센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단벽이 보이는 곳부터는 방문객은 출입을 할 수 없는 주거공간이다.

현재 소록도에는 총 5백여명의 한센인들이 있는데 백여명은 소록도병원에 입원 중이며

 4백여명은 소록도 내 주택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1992년 한센병 완치국가가 됐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사진을 담아 에 붙여 놓았는데

이들은 매일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다녀간다고 한다.

 

 

 

 

소록도(少鹿島)는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여 소록도로 불리우며

실제로 사슴을 기르다가 6마리의 사슴을 풀어줬는데(사연이 있었다고 함)

번식을 하여 지금은 이백여마리로 불어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사슴들이 먹이가 부족해 소록도 내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까지 발생하고

건물 입구에 와서 잠을 자기도 하며 어떤 녀석은 헤엄쳐 육지로 가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고 한다.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는 그저 평범한 말임에도 왠지 강한 울림을 준다.

그리고 갑자기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담은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에서는 당시 체 게바라가 천주교 수녀들이 운영하는 한센병동에 갔을 때

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그들과 악수하고 스스럼없이 지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를 보면서 당시 나병에 대한 일반인들의 무지를 알 수 있었고

아울러 비록 혁명가였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체 게바라의 숨겨진 면모도 알았다.

 

 

 

소록도자료관

 

 

 

검시실(1935년 건립)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이나 가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서 사망원인에 대한 검시(해부) 절차를 마친 뒤에야

장례식을 할 수 있었고 섬 내 화장장에서 화장 후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해부실

 

 

영안실

 

 

감금실(1935년 건립)

감금실은 일제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로 형무소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한센환자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장소로 직업, 거주이전, 이동의 자유 등을 박탈했고

수용된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았고, 강제노역을 해야 했으며 온갖 학대에도 굴종해야 했다.

 

감금실은 요양소의 부당한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출감시에는 예외없이 정관절제 수술을 당하였다.

 

 

 

 

위압적인 높다란 벽에 비해 작은 문을 지나 들어가면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는데 회랑이 두 개의 건물을 H자로 연결하고 있다.

 

 

 

 

마침 가랑비마저 내려 더욱 침잠됐고 건물 내에는

관람객들의 발걸음과 카메라의 셔텨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었다.

 

 

 

 

 

 

 

 

 

 

어둡고 무거운 건물들을 지나 아름답게 꾸며진 중앙공원으로 갔다.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여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1940년 4월에 6천평 규모로 완성되었다.  

 

 

 

다미안 공적비

 

 

 

 

 

구라탑(救癩塔)

한문 `癩`자는 "문둥병 라"로 처음 보는 글자다.

 

 

 

 

 

 

 

 

개원 제 40주년 기념비

여기서는 개원(開院)이 아닌 개원(開園)을 뜻하니 1980년을 말함일까?

사진을 찍을 때는 미처 자세히 보지 못했다.

 

 

 

기념비 앞에는 나환자 시인 한하운 님의 시비가 있다.

 

 

 

 

당시 장비도 열악했을 거고 더구나 성치않은 몸으로 이렇게 조성했다니 애잔함이 스며든다.

 

 

 

 

흙탕물처럼 더러운 세상에 예수의 참가르침이 깃들기를 빌며 연못에 반영된 예수상을 함께 담아봤다.

 

 

 

 

 

 

 

여기부터는 외부인 출입금지로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반송

 

 

 

솔송

 

 

 

녹산초등학교

 

 

 

중앙운동장과 중앙교회

 

 

 

중앙교회

 

 

 

돌아가는 길에 본 소록대교

리도 가까운 육지가 한센환자들에게는 안개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으리라.

 

거의 70여년 전 엄마의 추억과 발자취를 따라간 여행......

부초처럼 떠있는 저 작은 섬까지도 나의 기억 속에 담아가련다.

 

이 글은 고흥군이 초청한 홍보 팸투어에 참가하고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