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2천년 전 고대 로마로의 시간여행-폼페이

배흘림 2015. 4. 24. 12:08

 

화산폭발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석이 되어 버린 폼페이

(2015. 3. 10) 

 

폼페이는 이탈리아의 남부지방의 주요도시로 나폴리로부터는

남서쪽으로 23Km 떨어져 있으며 기원전 6세기 경에 도시가 형성됐다.

 

기원전 3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으나 퇴폐적이고 방탕과

향락이 최고조에 달했던 타락한 도시였으며

화산폭발 당시에는 2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폼페이는 3Km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처져 있었고

도로는 돌로 포장되어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인도와 마차길로 분리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 하수도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말의 서막이었는지 서기 62년에 큰 지진으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는데 복구도 채 끝나지 않은 시점인

서기 79년 사진에서 보이는 베수비오 산이 거대한 화산폭발을 일으켜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가스와  5~6m 두께의 화산재로 덮이면서

모든 것이 매장되는 폼페이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사진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의 능선은 그저 순하게 보이는데

폭발은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심판이었을까?

 

 

 

매표소를 통과하면 제일 먼저 맞게 되는 전경으로 집에서 사람들이 곧 나올 것만 같다.

 

 

폼페이는 화산폭발 후 거의 1500년이 흐른 뒤인 1549년 수로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1592년에는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으나 명목상 발굴이었지 약탈이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은 프랑스로 반출했고

일반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1861년에서야 폼페이의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전체 유적의 4/5정도가 발굴된 상태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아치형의 건축을 무척 좋아했었던 듯하다.

어딜 가든지 수로의 기둥 등에서도 아치형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폼페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고 그것은 당시의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슴을 보여준다.

 

12세기 초에 건설된 앙코르와트도 당시에 아치형의 건축기술이 없어서

회랑의 지붕이 아치형이 아닌 투박한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순천 선암사 승선교의 홍예도 아름다운 자랑거리 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화산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지붕들이 무너져 내렸고 기둥들 만이 남아 있었다.

 

 

주피터(제우스)신전

 

중앙광장에서 북쪽으로 베수비오산을 향해 주피터(제우스)신전이 세워져 있다.

 주피터신전 왼편에 식품 시장이 있고라리의 신전이, 그 옆에 베스파니아누스의 신전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현재의 법원역할은 하는 재판과 상업의 집행자리인 바실리카와

 선거를 위한 코미튬, 공공건물인 세개의 시청 건물이 있다

 

 

 

바실리카 옆에는 아폴로신전이 있고, 아폴로신전 옆에는 곡물창고가 있다

 

 

 

이제 중앙광장에서 2천년 전 그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요즘 상가건물의 셔터문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에 문은 미닫이였을까? 셔터형태였을까?

 

 

 

횡단보도                                                              야광표시석

 

좌 : 인도와 마차길이 분리된 도로 중간에 돌을 둠으로써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도록 유도하여 사람들이

 길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설치한 시설물로

기막히게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됐다.

우 : 어두운 밤에 길을 안내하는 야광표시석 

 

 

 

 

역시 지붕은 없다.

 

 

 

여기는 바닥의 타일과 벽이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다.

 

 

 

급수대

그런데 수도꼭지는 그 시대의 유산은 아니겠지?

 

 

 

 

 

 

 

 

홍등가

그시절 퇴폐와 향락이 극에 달했던 타락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

 

 

 

 

성을 매매하고 탐닉했을 돌침대

그런데 침대의 길이가 1m 50cm 정도로 짧다.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의 평균신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우리나라도 고궁이나 고택들의 방과 문이 작은 걸로 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신장은 계속 크는 쪽으로 진화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두 장의 사진 중 왼편은 바닥에 그려진 사창가로 가는 길 표시고

우측사진 역시 친절하게 홍등가로 가는 표시로 벽에 조각되어 있다.

 

아래 좌측 사진도 홍등가 표시며 우측은 건물 외벽에 돌이 삐죽 나와 있는데

이것 역시 사창가를 표시하는 것으로 당시 그들의 너무나 노골적인 표현에 경악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학설로는 고대 로마에서는 남근이 부와 행운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우리네 부적처럼 가게 주인들이 상가 주변에 조각을 했을 거라는 설도 존재한다고......

 

 

 

상수도관으로 그 당시에 이런 설비를 갖췄다니 이것 또한 경이롭다.

 

 

 

 

 

 

 

 

 

 

 

 

 

 

이곳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많은 항아리와 도기류, 착유기 등이 있는데

그릇 중에는 먹다가 토사물을 받을 용기까지 있다고......

 

그런 용기까지 준비해 놓고 먹도 토하고 또 먹고 했다니

당시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기술을 발달시켰으면서

왜 그렇게 미련한 짓들을 했을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추하면 그럴 수 있을까?

 

 

 

 

폼페이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순간에 갑자기 멸망하였기에 고대 로마의 건축, 문화 ,생활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박물관이 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폐허의 미학"이 아닐런지?

이상은 "폐허에도 분명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나의 철학!!

 

 

 

출토된 대리석 조리기구들로 맷돌, 냄비, 빵굽는 틀 등이다.

냄비는 지금도 전골냄비로 써도 충분할 듯!

 

 

 

화산 희생자의 캐스트

 

위와 아래의 사진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석고로 재현한 것이다.

화산폭발 때 생성되는 화산재가 사람을 완전하게 덮어 오랜 시간이 흘러

화산재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반면 화산재 내부의 시신은 썩어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에 석고를 채워넣어 폼페이 사람들의 최후의 모습을 되살려낸 것이다.

 

 

특히 아래 사진은 화산폭발시 가스가 분출되는 극한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몸부림치는 안타까운 장면이다.

 

 

 

화산 폭발 시 가스와 증기로부터 얼굴을 손으로 보호하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마부의 모습(좌), 개(우)

 

 

 

 

 

 

 

 

아마 가이드가 세신(때밀이)용 침대라고 설명을 했던 것으로......가물가물

 

 

목욕탕의 벽과 천장 조각

 

 

 

이 무늬는 목욕탕 내부의 습기로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아래로 흘러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개인 사물함

 

 

 

 

 

욕조

 

 

 

 

 

 

 

 

 

주방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조리가 가능해 보인다.

 

 

 

"개조심" 표시

 

 

 

 

 

 

 

 

 

 

 

당시의 공동묘지

 

 

우물

 

 

당시 최고의 주택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