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다산초당
(2012. 11. 25)
1990년대 중반 훗날 참여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유흥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유인 즉
1988년 올림픽이후 부동산광풍이 일고 국민들 소득수준이 높아졌는데
해외여행자유화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볼게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천박하게 여기고 여행지를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나타났었습니다.
마침 그럴때 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란 책이 나왔는데 수학여행풍의 여행 밖에
즐길줄 몰랐던 우리에게 이 책은 우리 땅의 돌 한개 풀 한 포기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성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여행지침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첫번째로 소개된 여행지가 남도답사일번지라는 이름으로
강진, 해남땅이었는데 영암 월출산 지역에 이어 강진의 다산초당 등이 소개됐었습니다.
그 시절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정작 다산초당을 처음 찾아간 것은 10년 쯤 지난 한참 후였습니다.
실은 광주, 목포, 강진, 순천 등에 출장을 많이 다녔기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다녀올 수
있었지만 업무시간에는 일에만 신경쓴다는 일념을 가지다보니 그렇게 됐었죠.
7년만에 다산초당에 답사를 갔는데 이번이 세번째 방문길이었습니다.
묘한 모양의 나무뿌리가 있고 그 옆에는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라는 시가 적혀 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처음에는 평이하다가
약간 가파라지는데 나무들이 뿌리를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300m 정도로 길지 않으며
길 양 옆으로는 대숲과 소나무가 울창해 한 낮에도 어두컴컴합니다.
오는길 석문공원에서 마지막 단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단풍은 아직도 색이 고왔습니다.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원래는 초가였는데 나중에 폐가가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새로 집을 짓고 기와를 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배자가 이렇게 호화로운(?) 집에서 살았다고 오해하면 아니~아니~아니 되옵니다.
조선후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연코 다산 정약용을 꼽을 겁니다.
그만큼 청치가, 사상가, 실학자, 경륜가, 경학자로서 다방면에서 출중했으며 수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으니까요.
다산은 1800년 그를 아끼던 정조가 죽고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됐는데 사의재(주막집 오두막), 보은산방 등 강진읍내에서 8년간 생활하다가
외가(해남윤씨)에서 이 곳에 거처를 마련해줘서 해배될 때까지 11년간 머무르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백여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다산초당의 현판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한 것으로 행서입니다.
다산초당 서쪽에 있는 서암으로 윤종기 등 18명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입니다.
다도로 유명한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도
정석(丁石)
다산이 손수 쓰고 새긴 각자(해서체)로 서예를 모르는 제가 보더라도 글씨가 정갈해 보입니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기와지붕에 툇마루가 넒은 모습입니다.
초당 앞에 있는 이 넓적한 바위는 다조라고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였던 곳이랍니다.
다산초당의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이 조그만 연못에 있습니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고 실용적으로 가꿨습니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도 만들어 놨구요.
연지석가산
다산은 연못 가운데에 돌을 쌓아 올리고 석가산이라 불렀고 연못에는 잉어를 키웠는데
해배된 후에 제자들에게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아꼈다고하며 잉어를 보고 날씨를 미리 알았다고 합니다.
두 마리 새의 형상을 한 두 개의 돌입니다.
동암
다산동암 현판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입니다.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예서)로 걸작이며
"다산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동암에서 조금 더 가면 "하늘 끝 한 모퉁이"란 뜻을 가진
천애일각을 줄인 천일각이란 정자가 나옵니다.
원래 이 천일각도 다산이 머무르던 시절에는 없었으며 1975년 강진군에서 세운 겁니다.
이 천일각에서 보면 강진만의 구강포와 건너편 칠량면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다산이 유배시절 사상적,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나러
다니던 오솔길로 푹신한 숲길을 걷노라면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느낌이 좋습니다.
이 오솔길을 걷다보면 야생차군락과 동백숲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는 800m군요.
해월루
해월루에 올라 바라본 강진만과 구강포
나무가지 사이로 백련사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