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며 역사 공부하는 삼랑성
(2014. 6. 22)
삼랑성(三郞城) 동문
강화도 전등사는 남문과 동문을 이용해 가는데 그 밖에도 서문과 북문이 있다.
그러니까 네 개의 문은 전등사 절집의 문이 아니라 삼랑성의 문인 것이다.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이라고 하며 성을 쌓은 연대도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다만 "고려사"에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삼랑성이라
이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니 4천년 이상된 무척 오래된 성이다.
처음 축성할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위에 막돌을 맞추어 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하였으며고 고려, 조선시대에 더욱 보강하였다.
삼랑성 안에는 전등사와 고려시대의 가궐지(假闕址), 조선시대의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한편 병인양요(1866)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 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 삼랑성 표지판 참조 ---
우리는 동문을 통과한 다음 전등사로 바로 가지 않고 우선 삼랑성 일주를 하기로 결정,
해운대 달맞이고개와 같은 정겨운 이름을 가진 "달맞이고개"로 가는 우측길로 올랐다.
그런데 이름만 정겨울 뿐이지 급경사 길이어서 오르느라 더운 날 땀 좀 뺐다.
그나마 거리가 불과 200m짜리 오르막이라 다행이었다.
달맞이고개 정상에 서니 시원한 바람이 급경사를 오르느라 흘린 땀을 식혀줬고
비록 해무로 인해 흐렸지만 멀리 김포까지 보였다.
달맞이고개에서 산성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으면 도착하는
삼랑성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으로 아마도 선두리 방향으로 추측된다.
삼랑성 정상에는 작은 표지판이 두 개 있는데 표기된 높이가
각각 113m와 222m로 거의 두 배나 될 정도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마침 산책 중인 전등사 스님께 여쭤 봤는데 "글쎄요?"란 답만 남기고 총총......
다음 지도에는 정족산이 222m로 되어 있으니 222m가 맞을 듯하다.
풍수가들에 의하면 마니산은 할아버지산이고 삼랑성과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은
할머니산이라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삼랑성 서문
밖에서 본 서문
서문 역시 동문과 마찬가지로 홍예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보수 중인지는 모르겠으나 천으로 둘러 싸서 보기에 흉했다.
신록이 우거져 산책로로도 손색없는 삼랑산성길
다시 남문을 향해 가는길 역시 길지는 않지만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산성길을 걷다보면 전등사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포인트도 만나게 된다.
달맞이고개에서 보다는 해무가 조금 걷혔다.
초지대교
저 바다가 강화해협이며 "염하"라고도 부른다.
산성길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의 자태가 멋스럽다.
참 강화도에도 소나무재선충병이 도는지 방역이 한참이던데 걱정스럽다.
자연지형을 이용한 옹성
산성의 성벽과 소나무의 어우러짐이 예술 그 자체다.
산성의 곡선미 역시 예술이다.
물론 돌을 이고 지고 옮겨와 이 아름다운 건축물인 산성을
쌓은 사람들의 노고는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
그들에게는 고통이 수반된 노동이었으리라.
처음에 동문에서 달맞이고개로 오르던 가파른 길이 보인다.
역시 사진으로 봐도 경사가 상당하다.
삼랑성의 남문 종해루
1976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양헌수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
그 전투의 승리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는데
만일 그 전투에서 패전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은 외규장각 등 우리의 수 많은
문화재들처럼 아직도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을테고 더 나아가서는 한반도가
베트남처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정족산 사고는 1931년 파손되어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강화문화사업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임진왜란(1592) 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에 3개의 외사고를 두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에 전주사고만 화를 면했고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전주사고본을 강화로 옮겨 선조 39년(1606)에 복인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봉안(奉安)하고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봉안하였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과 효종 4년(1653) 사각의 실화사건을 겪은 뒤
삼랑성 내에 정족산사고를 건립하여 이안(移安)하여 봉안하였다.
정족산사고본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옮겨졌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아픈 역사가 바로 우리의 역사임을 대변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가궐지(假闕址)
고려 고종 46년(1259)에 고려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터로
건물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또한 1908년에 강화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강화의병전투지이기도 하다.
'서울, 인천, 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동도의 교동향교와 교동읍성, 화개사 (0) | 2014.07.08 |
---|---|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최고(最古) 도량, 강화 전등사 (0) | 2014.07.04 |
S라인의 인천대교 야경 (0) | 2014.06.20 |
소래생태공원 스케치 (0) | 2014.06.18 |
안개가 없었던 소래생태공원 일출 (0) | 2014.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