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소태면 청룡사지
(2011. 8. 19)
1990년대 초반 친구의 고향인 충북 충주 소태면에 1년에 한 두번 방문했는데
4월초 친구네 집 뒷산에서 두릅이 나올때만큼은 꼭 들렀었습니다.
지금은 두릅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밤나무를 심었는데 지금도 그 향긋한 두릅향을 잊을 수가 없네요.
처음 친구집이 있는 소태에 갈때 자기집에 가려면 서울에서 경기도를 거치고
충북에 들어갔다가 나와 강원도를 거쳐 다시 충북으로 들어가야만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워낙 뻥이 쎈 친구라 믿질 않았는데 갈때보니 신기하게도 그랬고 소태면은 완전 오지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때 가봤던 청룡사지를 16년만에 다시 답사했습니다.
청룡사 위전비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2m가 넘는 크기의 사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비이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례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이 있어 절은 몇차례 보수와 중건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 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위전비는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했으며 당시 사찰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위전비 설명문 인용
머리 부분인 이수는 깨져 있었는데 주위에서 아무리 찾았지만 없었다고 합니다.
우전비의 조각은 매우 투박해서 미술적 가치는 없을것 같은데
비의 크기는 상당해서 당시 절의 규모가 굉장히 컸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 (보물 제656호)
청룡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고,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이하 문화재청 자료 인용
현재 상륜부는 보주를 설치했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 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火舍石) 사이로 본 숲
청룡사지 보각국사탑(靑龍寺址 普覺國師塔) (국보 제197호, 높이 2.63m)
충주시 소태면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탑으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탑은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탑 가운데 하나다.
상륜부의 맨 위는 세방향인데 태극모양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을 연상케하며,
아래 가운데 돌에서 올라간 용들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가운데 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보물 제658호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부도로 고운당사리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룡사지 아래에 있는 청룡사 삼성각
삼성각에 오르는 길에는 이끼가 짠뜩 끼어 있어 운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