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2010. 10. 28)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실상사 홈페이지에서 인용
.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층쌍탑(보물 제37호, 887년, 높이 5.4m)
석등(보물 제 35호)
삼층쌍탑(보물 제37호, 887년, 높이 5.4m)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백장암에는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이 있는데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으로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부도(36호, 고려),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 있다.
철제여래좌상(보물 제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