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세계 미술애호가들의 성지 바티칸미술관

배흘림 2015. 4. 11. 15:36

 

 

화려함에 놀라고 긴 줄에 놀랐던 바티칸박물관

(2015. 3. 9)

 

 

바티칸미술관은 16세기에 건설됐고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전 세계에서 한 해에 4백만명 이상이 찾아오는 미술애호가들의 성지다.

 

예전에는 이 문이 바티칸미술관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진의 왼쪽에 있는 문으로 가서 보안검사를 받은 후 입장한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8시 20분경으로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200여m 줄이 서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선택한 여행사의 상품은

인터넷예약비를 따로 지불하고 예약을 했기에 대기시간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일반 입장의 경우 바티칸미술관은 보통 2~3시간, 길게는 5시간을 길에서 허비하게 되므로

이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이탈리아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인터넷예약을 꼭 권하고 싶다.

 

인터넷예약은 바티칸박물관 뿐 아니라 콜로세움, 우피치미술관 등

유명 관광지 모두에서 시간을 절약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였다. 

 

 

 

르네상스의 두 천재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좌)와 라파엘로 산치오(우)

 

 

지금의 바티칸미술관은 교황 율리오 2세의 개혁정신과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산물이었으며

아울러 바티칸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비젼을 두 천재 거장이 구현해 준 결과물이다.

 

216대 교황 율리오 2세는 로마의 재건사업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전세계에 바티칸의 권위를 알리고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줄 건물을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4세기에 세워진 낡은 성당을 허물고 세계 최고의 성당을 세우려고 했으나

독실한 신자들에게는 낡은 성당이 진정한 성소이며 유서깊은 성당을 허무는 것은

신에 대한 불경한 짓이라고 주장했고 율리오 2세의 계획은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바티칸을 새롭게 바꾸겠다는 야침찬 계획을 세운 교황 율리오 2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바티칸을 가득 채우고 싶어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두 명의 천재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불러 들였다.

 

※참고로 현재의 바티칸미술관이 존재하게 한 인물들을 정리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1475년~1564년

라파엘로 산치오 : 1483년~1520년

216대 교황 율리오 2세 : 1443년~1513년 (임기 : 1503~1513)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년~1519년)는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자격으로 넣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중에서도 최고 거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인데 바티칸미술관에는 다빈치의 작품이 별로 없었다.

 

다빈치가 바티칸의 재건시기와 맞지 않아 참여하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은 각국이 동성애자의 결혼을 인정하고 바티칸도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지만 유럽에서도 1950년대까지는 동성애자를 형사처벌했었다.

하물며 보수의 상징인 바티칸에서는 오죽했으랴.

 

 

 

 

입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처음 대하는 공간으로 별 의미는 없으나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돔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솔방울정원(피냐정원)

박물관투어는 솔방울정원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시스티나성당에서는

사진촬영물론 말도 할 수 없기에 보통 이 솔방울정원 한켠에 있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사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입장을 한다

 

 

솔방울형상

원래 판테온 근처 로마시대 분수대의 장식이었는데 이 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솔방울 아래 양쪽 측면의 청동공작상은 하드리아누스황제 무덤 장식을 본 뜬 모조품이며

솔방울의 위 끝부분의 색이 다른 이유는 없어진 부분을 나중에 얹었기 때문이라고.......

 

 

 

지구안의 지구 (Sphere within Sphere)

고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한가운데에 생뚱맞게 현대 설치미술작품 한 점이

흉측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이 작품은 1960년 로마올림픽을 기념해 구리로 제작한

것으로 오염되고 병들어 가는 지구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건물의 우측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사진 앞에서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은 볼 것이 풍부하고 역사와도 밀접하므로 여행 전에

관련 책을 읽거나 인터넷 검색을 꼭 하고 가라고 당부하고 싶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탈리아관련 여행서적과 로마제국의 역사,

그리스로마신화까지 조금 알고 간다면 좀 더 알차고 밀도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나는 책을 보고 갔슴에도 워낙 볼거리도 많고 패키지여행의 특성상 휙휙 지나가니

정신이 혼미해 정리가 잘 안됐지만 그나마 선행학습(?)이 큰 도움이 됐다고 자부한다.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티누스황제의 두상

 

 

 

 

솔방울정원(피냐정원)에서 벨베데레정원(팔각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바티칸 문장으로

황금열쇠는 교황의 영적 권위를 상징하고 은열쇠는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상징하는데

두 개의 열쇠를 교차시킨 것이 바티칸의 문장이다.

 

 

 

 

 

이번 이탈리아여행은 결론적으로 대만족이었는데 여러 요인 중 날씨가 쾌청했다는 점,

여행사에서 주요 방문지에 인터넷예약을 해 준 덕분에 대기시간 없이 관람한 점,

비록 패키지였지만 함께 한 일행 분들도 여행경험이 풍부해서 열심히 듣고,

찍고 하나라도 더 보려는 자세를 가진 훌륭한 여행자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여행자들의 꼴불견 중 하나인 시도 때도 없이 걸치

아웃도어를 입고 다니는 분이 한 분 도 없었다는 것 역시 맘에 들었다.

 

 

 

 

이제부터 벨베데레정원(팔각정원)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미술품 감상에 들어간다

벨베데레정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을 수집,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다.

 

 

 

벨베데레의 아폴로

전투에 나간 아폴로신이 자신이 쏜 화살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8등신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로 현대남성모델들의 대선배되시겠다.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예수의 얼굴로 차용했다고 하는데

얼굴이나 비율보다도 대리석의 섬세한 옷주름 조각이 더욱 경이롭다.

사진을 보는 지금도 팔에 감긴 옷을 벗기면 바로 벗겨질 듯하다

 

 

 

라오콘군상

아폴로와 함께 벨베데레정원에서 최고의 조각작품으로 꼽는 라오콘군상은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트로이목마에 얽힌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트로이의

신관이었던 라오콘은 그리스의 목마를 트로이 안으로 들이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에 그리스 편을 들은 신들이 분노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거대한 뱀 두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두 아들을 죽이는 모습이다.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라오콘이 뱀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는데 역동적인 형태와 아름답고 세밀하게 묘사된 근육,

고통이 생생하게 드러난 라오콘의 표정이 담겨 있고 왼쪽의 아들은 죽어가고 있고

오른쪽의 아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라오콘군상 작품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로마의 한 언덕에서

우연히 발견됐으며 발견 당시에는 라오콘의 오른팔이 없었다.

 

바티칸으로 온 라오콘군상은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의 오른팔을 단 채 전시됐으며

-기록에 의하면-그동안 총 일곱 개의 팔을 바꿔가며 전시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05년 한 석공의 작업장 창고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팔 일부가 발견됐고

고고학자이자 미술상인 루드비히 폴라크가 발견하여 바티칸미술관에 기증했다.

 

팔의 크기와 재질을 정밀 분석한 결과 라오콘의 오른팔로 판명됐으며

이후 팔을 붙이는데만도 3년이나 걸렸다. 

 

 

 

 

티그리스강을 지키는 의 신 티그리스

우리나라 40,50대 남성들의 거실 소파에서의 자세를 담은 작품이라나.....뭐라나.......

 

 

 

아뿔싸! 핀이 안 맞았다.

 

 

 

"뮤즈의 방"의 천정화

뮤즈는 학문, 예술, 시, 무용 등을 관장하는 아홉명의 여신이다.

 

 

 

돔의 창문을 통해 실내 채광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로마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건축물인 판테온을 모방한 것이라는데

우리는 판테온을 나중에 가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하고는 갸우뚱했었다.

 

 

 

이 작품이 유명한  토르소

이 작품이 그 유명한 토르소로 머리와 팔다리가 잘려 나갔지만 이 상태만으로도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강인한 근육질의 상반신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의 수축된 근육을 아름답게 표현된 조각상이다.

 

천하의 미켈란젤로도 틈틈이 와서 이 작품을 눈여겨 보고 만져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청동상

 

 

 

갈바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하나의 조각상을 다른 각도에서 찍어 두 장을 붙여 비교해 보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든다. 

 

 

 

네로황제의 욕조

 

 

 

십자가의 방에 있는 3세기 경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 작품으로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모자이크타일 작품의 가운데 원 안의 여인은 전쟁의 여신 아테나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의 대리석 관

 

 

 

콘스탄티누스의 딸인 콘스티나의 대리석 관

 

 

 

 

 

 

 

 

 

레오 13세의 문장

 

 

 

지도회랑

회랑의 벽면에는 이탈리아의 각 지역들의 지도들이 있고

천장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화려하게 금빛으로 수 놓고 있다.

 

천장의 그림들은 얼핏보면 입체적으로 보여서 그림이 아닌 조각처럼 보이는데

프레스코화라고하니 그 당시 사람들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고 할 수 밖에.....

 

 

 

 

시스티나성당은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도 종종 열리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소장된 바티칸미술관의 보물창고다.

 

개혁적이고 정치적 야심이 컸던 교황 율리오 2세는 바티칸의 권위를 세우고자

1506년 대성당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1509년에는 바티칸궁전의 재단장사업도 착수한다.

 

아울러 시스티나성당 보수작업도 시작하면서

이전 성당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도록 대규모 프레스코화를 주문했다.

이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푸른색별만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시스티나성당 내에서는 사진촬영은 물론 큰소리의 대화도 금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진들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천정화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속 이야기 중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으로

빛과 어둠의 창조, 해와 달 초목의 창조 등 크게 아홉가지 부분으로 그려졌다.

 

성당내부에 신이 인간처럼 묘사되어 그려진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며

아담도 벌거벗은 청년으로 대담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율리오 2세는 누드화를 허락했다.

 

그의 이런 정신이 서양인들로 하여금 미켈란젤로를 좋아하게끔 만든 거라고 생각해 본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창작의 불꽃을 피운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듯이......

 

 

 

 

미켈란젤로가 이 천정화 천지창조를 그리게 된 연유도 특이하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 장식에 쓸 조각을 만들기 위해 스케치한 것을

교황 율리오 2세가 봤는데 평면에서 3차원 입체를 표현해 내는 미켈린젤로의 솜씨에

크게 감탄하여 시스티나성당 천정화를 맡기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이 조각가라고 생각하던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주문이 조각이 아닌 그림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크게 낙담하여 친구에게 편지를 남기고 피렌체로 돌아갔다.

 

그러나 날카롭고 사나운 성격으로 당시 무서운 교황으로 소문나 있어

"전사"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포기하지 않고

피렌체의 고위관리를 통해 미케란젤로를 설득하면서 후한 대접도 약속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진심어린 편지에 뉘우치며 율리오 2세에게 사과하고

1508년 천정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4년 5개월 만인 1512년 완성했다.

 

미켈란젤로는 거의 누운 상태로 그림을 그려서 목에 장애를 초래했고

떨어지는 분진으로 인해 시력까지 많이 나빠졌다.

 

 

 

가장 많이 알려진 천지창조 중 네번째  "아담의 창조"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함에 신비감이 느껴진다.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를 완성한 후 미켈란젤로는 페렌체로 돌아갔고

1527년 피렌체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자 교황은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피렌체를 포위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교황에 반발하며 시민군 편을 든다.

그리고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시민봉기참여와 도피생활은 미켈란젤로를 크게 바꿔놓은 계기였다.

 

16세기초 마틴 루터로부터 영감을 받은 종교개혁의 물결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확산됐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바티칸의 교황 바오로 3세는 강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메시지를 전할 도구는 바로 시스티나성당에 들어설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레스코화였다.

 

화가로는 미켈란젤로를 지목하고

시스티나성당 제단 뒤쪽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천지창조를 완성한지 23년이 지난 61세의 나이였다.

그리고 6년 뒤 최후의 심판은 완성됐다.

 

중세 가톡릭교회의 부패해 대항한 것이 종교개혁인데 유럽의 6백년 전보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지도자들이 그 당시 바티칸보다 더 썩었다.

물론 불교의 대가리들도......

 

어쩜 그리도 오십보 백보 도긴개긴

똑 같은지 역시 역사는 돌고 돈다.

쿼바디스.....

 

 

 

최후의 심판은 무려 391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 : 팔을 들고 서서 심판을 내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미켈란젤로는 그 동안의 관행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수염도 없는

젊은이로 묘사하는 파격을 감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었다.

 

중 : 천사가 두 명의 흑인을 지옥에서 끌어 올리는 장면으로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인종문제까지 다루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미켈란젤로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최후의 만찬은 모든 인물이 나체였기에 교황의 의전 담당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로부터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고 그를 뱀에 감겨 고통받는 모습으로 우측 하단 지옥 부분에 넣었다.

그러나 뒤에 다니엘레 다 볼데라에 의해 나체는 살짝살짝 가려지게 되었다. 

 

 

 

 

종교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된 것도 최후의 심판이 최초였다.

미켈란젤로는 종교개혁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가톨리교회에 등을 돌리며

지옥으로 간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종교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담아냈다.

 

아울러 미켈란젤로 자신도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이

혹독한 운명에 신음하는 존재로 그림에 등장한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린 참혹한 존재

이 사람의 영혼은 목적지도 없이 영원히 떠돈다.

이 껍데기 육신의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을 재발견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 걸작이다.

 

미켈란젤로는 사람의 표정을 세밀하게 연구했으며

인간의 나쁜 감정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굳히게 됐다.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을 완성한 후에도

산 피에트로성당의 돔을 설계했으며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중세의 세계관과 예술을 완전히 바꿔 놓았던

르네상스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려가던 무렵이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고

인간의 감정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점이다.

 

르네상스는 근대적 정신이 태어나던 시대로 어떤 힘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 후 사람들은 신에 덜 의존하게 됐으며 독립심이 커졌다.

 

위대한 예술가들 덕분에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정점에 있었고

근대적인 세계관과 예술관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과 예술로부터 비롯되었다

 

 ---EBS 다큐 "바티칸 미술관의 보물들 두 거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참조---

 

 

 

 

 

 

 

이제 바티칸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산 피에트로대성당으로 간다.

그런데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라파엘로의 방을 들리지 않은 거였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원래 계획에 없었다고.......

참 여기까지 와서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을 못 보고 간다니

참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어쩌랴 힘 없는 "을" 여행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