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
중국 황실의 여름별궁 이화원
(2011. 4. 6)
베이징의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중국 황실의 여름 별궁이자 최대규모의 황실정원인 "이화원"은
외국인관광객보다 내국인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더군요. 특히 중국의 시골에서 온 농민들이 많은데
"그럼 소는 누가 키우지?"
금나라때인 12세기 초에 조성되어 호신원으로 불렸다가 청나라 건륭제때 확장하면서 청이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860년 제2차 아편전쟁때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약탈 당하고 파괴되었는데 1886년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면서
이화원으로 불리게 됐고 이때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서 국사를 볼 수 있는 궁전형태로 변모시켰답니다.
서태후가 해군 함정 건조 예산인 30만은을 유용하여 이화원 재건비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로 인해 군대의 사기가 저하되어
청나라는1894년 청일전쟁에서 어이없이 패배했고 세계 만방에 국력이 형편 없슴을 알리는 꼴이 됐다고 합니다.
이화원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이화원의 면적은 2.9 평방Km인데 인공호수인 쿤밍호는 이화원 면적의 3/4인 2.2 평방Km입니다.
쿤밍호를 만들때 파낸 흙으로 60m 높이의 만수산을 쌓았다고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태후의 거처인 낙수당
낙수당이라는 현판에 즐겁게 장수하려는 욕심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화원"을 알려면 서태후에 대해 알아야겠더군요
서태후는 만주족으로 안휘성의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는데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인인 "영록"을 버리고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 갔다. 이후 황제와 가까운 환관들의 환심을 사서 후궁이 된 후 황제의 유일한 혈육을 낳았다.
함풍제가 1860년 31세에 요절하자 6살인 아들이 황제 동치제가 되었다.
바로 황제의 어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성장하면 자신의 권력이 아들에게 넘어 갈 것이 두려운 서태후는 동치제를 궁궐 밖의
홍등가의 쾌락에 빠져 들게해서 결국 질병에 걸려 죽게하고 임신 중인 황후마저 자살케 만든다.
권력 앞에서 서태후에게 아들과 손자는 모두 경쟁자일 뿐이었다.
이 후 함풍제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불과 네 살짜리 광서제를 황제로 옹립하고 수렴청정을 계속했고
1889년 광서제를 결혼시키면서 오랜 수렴청정을 끝내고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이화원으로 거쳐를 옮겼다.
그러나 이미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서태후에게는 또 다른 섭정일 뿐이었고 광서제는 수시로 이화원으로 찾아가 국정을
보고하고 지시 받았다.
광서제가 개혁을 위해 변법자강운동에 나섰지만 위안스카이의 배반으로 오히려 광서제는 자금성 영대에 유폐되고 만다.
(무술정변) 그 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세 살짜리 선통제 부의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약을 가장한 독약에 죽고 서태후는 자신의 생일에 먹은 음식 때문에 이질에 걸려 조카인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1908년 73세로 생을 마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작가 김영미 씨 글에서 축약, 인용
중국 최대의 경극극장이 있는 덕화원도 찍었는데 찾아보니 없네요.
장랑(회랑)이 있는데 길이는 778m, 273칸인 긴 복도이고 천장과 벽에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워낙 바쁜 패키지 여행이라 서태후가 회랑을 걸었듯이 한 번 걸어가면서 휙 지나가면 끝입니다.
사실 만수산과 절에도 가보고 싶었으나 일정에 없다고 해서 그냥 나왔는데 아쉬웠구요.
바다처럼 넓은 쿤밍호
이게 인공호수라니 정녕 믿기질 않네요.
중국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돌배(石舟)입니다.
한 여인의 타락?
한 권력자의 집념?
아뭏든 이화원은 나라와 백성을 농락한 서태후란 여인의 욕망의 결정체라고나 할까요?
나라를 거덜내고도 자신은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천수를 다한 여인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비극적인 삶이었다고 할까?
결론은 더러운 추악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