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메밀꽃축제장 스케치
(2012. 9. 15)
개미여행사 주관으로 4년 만에봉평메밀꽃축제장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축제장 주변에는 대형 식당과 펜션 등이 많이 들어서 경치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입장료 2천원을 받는 것이었다.
입장료를 내면 이효석문학관 등 다섯 곳을 출입 할 수 있었다.
불과 3,40년 전만해도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 먹던 구황식물인 메밀이 이제는 웰빙음식이 됐고
그 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니 세상의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해야할까? 상전벽해라고 해야할까?
메밀은 한해살이풀로 높이는 60~90cm 가량이고 꽃은 흰색이며 늦여름에 무리지어 피며,
건조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등 척박한 환경에서도 적응하는 힘이 강하다고 한다.
메밀꽃에는 꿀이 많아 벌꿀의 밀원이 되며 열매는 메밀묵이나 면을 만드는 원료로 쓰이는데
비만예방, 피부미용, 성인병, 고혈압, 간기능개선, 이뇨작용을 원활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메밀은 차가운 성질을 지녀서 열을 내려주고 염증을 가라앉히며 배변을 용이하게 도와준다.
반면 소화기능이 약하거니 찬음식을 먹으면 배가 아프고 설사를 자주하는 사람은 섭취를 줄여야 한다.
이 두 장의 사진을 올리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전혀 모르는 가족들의 사진을 올려도 되는지 말이다.
하지만 너무 예쁘고 모녀의 표정이 좋아 올려보려 한다.
물론 사진 찍을때 이들 가족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슴을 밝혀둔다.
섶다리
메밀꽃밭으로 가려면 섶다리와 징검다리를 건너야 한다.
물론 옆에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가 있으니 그걸 이용해도 된다.
징검다리
이 녀석은 맨 손으로 메기 한마리를 잡는 성과(?)를 올렸다.
손 맛이 어떨까? 낚시에는 문외한인지라 궁금하다.
단편소설인 "메밀꽃 필 무렵" 은 장돌뱅이 허생원과 아들 동이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지만 소설에서는 직접 표현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짐작을 할 수 있게 한다.
둘이서 달밤에 메밀꽃밭을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동이 엄마의 친정이 봉평이고,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것, 물에 빠진 허생원이 동이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널때
허생원이 따뜻한 혈육의 정을 느끼는 대목에서 두 사람이 부자지간임을 짐작하게 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줄거리
허생원은 장돌뱅이로 장이 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떠돌아다닌다.
어느 날 묵고 있던 충주댁네로 돌아온 허생원은 우연히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댁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손찌검까지 하지만 자신의 당나귀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달려와 알려주는 동이의 마음 씀씀이에 화를 누그러뜨린다.
봉평장에서 재미를 못 본 장꾼(허생원, 조선달, 동이)들이 이튿날 열리는 대화장을 기대하며
달빛 아래 메밀꽃밭 칠십 리 밤길를 걸어가며 얘기를 주고 받는데 허생원은 젊었을 적부터
평생을 간직한 그리움의 대상이자 추억인 봉평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을 이야기한다.
이어 동이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가던 중에
허생원이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동이에게 업혀 가는데 그는 동이 모친의 친정이
바로 봉평이며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동이가 어쩌면
허생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소설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된다.
이효석의 호는 "가산", 필명은 "아세아" 였다.
1907.2.23 태어나 1942. 5. 25. 젊은 나이인 36세에 요절한다.
학력 :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천재
경력 :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숭실전문학교 교수,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
데뷔 : 1928년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으로 도시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고발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카프(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진영에서 동반자작가라는 호칭을 붙여 줬으나 카프의 회원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1931년 25세에 결혼했는데 취업이 안돼 어려울때
일본인 은사가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자리를 주선해줬다.
그러나 고등교육까지 받은 이효석이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것에 대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함경도 경성의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가 된다.
이효석은 1940년에 부인이 1남 2녀를 남겨두고 죽자 실의에 빠져 만주 등지로
떠돌아 다니다가 건강을 해치고 1942년 결핵성뇌막염에 걸려 요절했다.
이효석의 문학세게는 한마디로 "향수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그 향수 속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서구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고 한다.
이효석은 5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게모 밑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 국민학교도
집에서 백리나 떨어진 평창읍에서 하숙을 했으며 심지어 계모는 이효석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아픔이 향수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한다.
향토색 짙은 서정의 세계를 아름답게 쓴 이효석은 귀공자 타잎이었고 칠피단화,
나비형상 장식을 붙인 멋쟁이로 커피는 모카나 퍼콜레이트를 마시고 피아노는
쇼팽을 쳤으며 여자를 군것질하듯 좋아 했다는 또 다른 면도 가지고 있다.
앞에 앉아 있는 분은 사진을 찍고나서보니 아는 분이었다.